스포츠 족구의 태동과 과도기, 보급기, 정착기
족구의 태동과 과도기
옛 문헌에 우리 조상들은 삼국시대부터 짚 따위나 마른풀로 공을 엮어 만들어 중간에 벽을 쌓고 넘기는 경기를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족구의 역사는 1300년도 더 오래되었음을 추측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이미 장비된 시설과 규칙을 가진 규모 있는 공차기가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었으며, 그 중 운동장의 중간에 하나의 칸막이를 세우고 양쪽에 두 편이 갈라서 서로 공을 마주 차 넘기는 것이 있었다. 운동장 중간에 두 기둥을 세우고 기둥의 아래 부분에는 그물을 건너 쳐서 공이 지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두 기둥 사이로 차 넘기는 방식이며, 차넘긴 공은 그물에 걸리지 않고 바로 상대편으로 넘어가야 점수를 얻게 되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대체로 족구와 비슷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8.15 해방 및 6.25 사변 이후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재건을 위한 국방력의 보유가 절대적으로 요망되고 있었으며, 1953년 7월 휴전 이후 1960년대 이전까지 군에서는 군 재정비 때문에 장병의 여가차원의 체육활동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으므로 스포츠 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우리 군의 재정비가 어느 정도 진행된 1960년 공군 제11전투비행대대 조종사들이 비상대기 임무를 수행하면서 간편히 조종복을 입은 채 할 수 있는 운동을 착안하여 배구장에서 배구 네트를 땅에 닿도록 내려놓고 축구공이나 배구공으로 인원에 제한 없이 축구와 같이 손만 사용하지 못하고 몸의 어느 부위나 다 사용하여 배구와 같이 3번에 상대편 코트로 넘기는 규칙으로 경기를 시작한 것이 최초의 시작이었으며, 이것이 국방부 산하 각 육군 해군 부대에 전파되어 국방부 발간 국군 체육이란 경기규칙을 기록한 책자에 족구라는 경기가 최초로 기록되었다. 그 후 육군에 전파된 근원이 당시 공군에서 운영하는 합동작전학교에 육군 작전장교 및 하사관이 연 1000여 명 정도 수료하게 되는데 그곳에서는 휴식시간 및 점심시간에 족구를 하였다. 경기장이 필요 없이 맨 땅에 물주전자로 금을 긋고 축구공이나 배구공 하나만으로 인원에 구애 없이 간단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장병이 선호다가 부대에 돌아가서 하게 된 것이 전파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해군은 당시 합동작전회의라는 명칭으로 해군과 공군은 연 1회씩 해군작전사령부와 공군작전사령부가 격년제로 주최하여 친선모임을 실시하였다. 이 때 해군의 함장과 공군의 편대장들이 함께 시합을 하였고 사관학교 기수별 또는 해군 대 공군 등으로 나누어서 경기를 하였으며 해군 함장들이 해군에 돌아가 족구 경기를 좁은 공간의 함상에서 또는 육지에서 실시하였고, 이렇게 하여 모든 부대에 보급되게 된 족구는 군의 복무를 마치고 각 기업에 취직한 사람들이 휴식시간에 족구를 하던 것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보급기
1970년대 공군에서는 족구라는 명칭으로 완전하게 정착하게 되었으나, 경기 방식과 규칙이 각 지역 및 직장마다 조금씩 달랐다. 공군 장병들은 부대 내의 주기장이나 배구장이나 축구장 등 여러 장소에서 족구를 즐겨해 왔다. 처음으로 족구 규칙이 게재된 책자는 1974년 1월 1일 국방부의 “체력 관리”이며, 그 당시에는 6인제의 족구 규칙이 적용되었으며, 네트의 높이가 2m나 되었다. 1978년 경기규칙은 4인제로 네트 높이는 1m, 넓이 9x19m로 축구공을 사용하였으며, 머리는 사용하지 않고 발만 사용하였다. 이후 전역한 군인들이 직장이나 대학에 복학하여 족구를 보급하였는데, 국민적 정서에 부합하고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용이성과 다 같이 참여하는 즐거움 때문에 급속도로 민간 사회에 보급되었다. 초기 6인조 족구는 많은 인원을 참가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착안된 경기 방식이었으며, 센터포드(네트 앞 중앙)의 위치 때문에 수비 방해가 문제 되어 공군 장병들은 6인제보다 4인제 족구의 경기 방식을 더 선호하였다. 공군 제1비행단에서는 4인제 코드는 9x8m이며, 머리는 사용하지 않고 무릎 이하면 사용한다는 독자적인 경기 규칙을 적용하여 족구 경기를 하였으며, 1975년 이후 이 경기 규칙이 전 부대에 보급되면서부터 족구 경기 시 머리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1995년 11월 제1회 공군참모총장기 족구대회부터 당시 대한족구협회 공식 규칙을 전폭 수용하게 되어 머리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착기
1980년대 경제의 발전과 군사 정권으 통치권자의 스포츠에 대한 지원 정책의 영향으로 족구가 명실공히 국민스포츠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오늘날 국민의 열기와 정보의 생활체육 활성화 방안에 힘입어 많은 동호인을 양성해 내고 해외 교포사회까지 전파되는 등 민족고유의 구기로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되었다. 국민생활 체육의 범주에서 활동하던 기존과는 달리 본격적인 대한체육회 가입과 더불어 향후 족구에 대한 관심과 집중으로 국가적인 지원과 함께 엘리트 스포츠로써 자리매김하게 되었다.